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역사 (문단 편집) == [[보스니아 전쟁]] == [youtube(RWvBG4-tUDg)] 90년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공중분해, 연방을 이루고 있던 옆나라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독립선언과 성공에 자극을 받아 보슈냐크계 주민과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협력하여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가 격렬히 반발, 분리독립반대 무장투쟁에 돌입하자 유고 연방의 종주국인 세르비아가 내전에 개입하였다.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이틀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하는 독립 [[국민투표]]를 시행하였다. 국민투표는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 [[프라뇨 투지만]]의 지원을 받았다.]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기였기에 가결될 가능성이 컸고,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는 독립 국민투표를 인정할 수 없다며 [[보이콧]]했다. 3월 1일까지 진행된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63.73%였고 유효표 중 찬성은 99.71%에 달하여 독립 국민투표는 가결됐다. 세르비아계가 보이콧을 한 상황에서 이 국민투표는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거의 전부가 독립을 원한다는 증거가 됐다. [[1992년]] [[4월 1일]] [[이슬람]]계를 대표하여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사라예보]]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뒤질세라 [[1992년]] [[4월 6일]] [[라도반 카라지치]]는 사라예보 남동쪽에 있는 세르비아 접경지 팔레(Pale)에서 [[세르비아]]의 지원을 얻어 사실상 [[괴뢰국]]인 [[스릅스카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미 직전년도인 [[1991년]] 보스니아 국회에서 카라지치가 "[[무슬림]]놈들 독립 선언하면 '''[[Remove Kebab|다 죽을 줄 알아라.]]'''"라고 협박하는 지경이었고, [[1991년]] 연말부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들이 서로 [[집단구타]]를 하는 등 폭력사태가 빈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4월]] 이제트베고비치와 카라지치의 건국 선언이 이뤄지자 보슈냐크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총]], [[폭탄]], [[지뢰]]를 끌고 나오며 [[전쟁]]을 개시했다'''. 아무런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개전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정규군이 없었다! 그래서 보스니아가 제대로 된 정규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을 창설하기 전까지는 민병대나 준군사조직 등으로 버텼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전쟁이 갑자기 발생하게 된 원인은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유고 연방군 및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신나게 털리던]]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군의 대공세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보스니아 전쟁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쟁초기 세르비아 민병대는 거의 양민학살급으로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를 쓸어버렸다. 세르비아계 주민의 무장투쟁과 민간인 학살은 1945년 이후 약 반세기 만의 인종말살전쟁으로 비화되면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지만, 별로 건질 것이 없는 보스니아 전쟁에 [[미국]]과 서구 국가들은 굼뜬 반응만을 보여주면서 비극은 확산되었다. 이는 국제사회가 인의도덕보다 냉정한 실리에 움직이는 정세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더욱이 '인도적'이라는 이름을 걸고 내전에 직접 개입해 병력은 파병하고 지나치게 '인도적'이라는 명분에 목을 매면서 중립을 지켜 사태악화에 일조하는 무능함까지 보여주었다. 내전은 초반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연합해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구조였다. 아주 잠깐 크로아티아계가 보슈냐크계에 전쟁을 선포하기는 했으나 본국인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유고 연방군에 영혼까지 털리느냐 마느냐의 상황에 처해있었던 데다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에서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를 박멸하느냐 마느냐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금세 화해하고[* 하지만 화해하고 나서도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한테 관리지역을 넘겨주는데 1년 6개월이나 걸렸다. 그 와중에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해안 일대에 살던 보슈냐크인 무슬림들은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그래서 [[보슈냐크인]]들은 뒤통수 오지게 때린 [[프라뇨 투지만]] 전 크로아티아 대통령을 싫어한다.] 세르비아계에 대항했다. 그러나 NATO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까지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유고 연방군에게 처절할 정도로 발렸다. 그나마 박멸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UN평화유지군 및 NATO가 민간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한 것은 국제사회의 비난에 어쩔 수 없이 NATO가 보슈냐크계, 크로아티아계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결국 갈등이 수습되지 않고 계속 커지자 보다못한 미국이 나서서 무력중재에 돌입했다. 먼저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주요거점에 집중폭격을 가해 크로아티아계, 무슬림계가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유고 연방군에 반격을 할 수 있게 도와 전세를 바꾼후, 러시아, [[독일]] 등을 끼워넣어 구색을 맞춘 [[UN]]의 조정을 거쳐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휴전 및 내전종식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해체되고 보스니아계 무슬림의 공화국과 세르비아계의 [[스릅스카 공화국]] 등 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 공화제가 국체(國體)로 선택되었으나, 옆나라인 신(新)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상황이 요동칠 때마다 보스니아 정국도 불안해졌다. 사실 데이턴 협정의 핵심내용은 '이 협정을 어긴 놈은 미국과 NATO가 아주 영혼까지 부숴버릴거야'라는 협박이다. 협정조인 자체가 미국에서, 그것도 아주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분쟁 당사자들이 조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 후 충분히 내전이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내전이 재발하지 않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국가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